2022. 10. 3. 12:21ㆍ책쓰기_1년1권
괜찮아, 괜찮아! 뉴욕 아니어도 괜찮아
꿈
꿈이 있었다. 세계를 누비며 살고 싶은 꿈이었다. 대학에서 패션을 전공하던 시절부터 뉴욕의 꿈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대학 졸업 후 바로 국내 패션회사에 디자이너로 일을 시작했다. 아름다움을 찾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일은 꽤나 흥미로웠다. 하지만 마음에는 늘 세계 패션의 중심 '뉴욕'이 있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양육하면서 회사를 그만두었다. 육아 중 틈틈이 대학원을 다녔다. 대학원을 졸업하니 패션업계로 돌아가는 대신 대학강사의 새로운 길이 열렸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대학 패션학과에선 패션계 현장 경험을 가진 교수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지방에 있는 대학 전임교수로 바로 임용되었다.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바쁘게 살았다.
대학교수 10년 차, 나름 후진을 육성한다는 보람도 있었고 사회적으로 인정과 대우도 받았다. 그러나 서울과 지방을 오가는 주말 가족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벌써 한국식 대학 입시 경쟁에 돌입해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계속할 수는 없었다. 뭔가 새로운 도전, 돌파구가 필요했다. 고민이 시작됐다.
뉴욕의 꿈
마음에 접어두었던 뉴욕의 꿈이 눈앞에 다시 아른거렸다. 세계 패션의 중심 뉴욕의 패션 현장이 궁금했고 뉴욕의 패션가를 활보하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뉴욕에 가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결혼 전 이루지 못한 유학을 생각하기도 했지만 여러 가지 부담이 있었다. 그나마 뉴욕에 있는 대학에 방문교수로 단기 체류하는 방법이 가장 현실적이었다.
여러 단계를 거쳐 운 좋게 국가지원(포스트닥터 해외연수)까지 받아, 최종 미국 뉴욕주립대학에 방문교수로 초청을 받게 되었다. 미국 교수의 초청장을 받았던 날은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뻤다. 정말이지 날아갈 것만 같았다. 남편은 서울에 남고, 중1. 고1 아이들만 데리고, 고민도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용감하게 미국을 향해 떠났다.
처음 계획은 아이들과 미국 뉴욕을 경험하며 1년만 즐겁게 놀다 오자였다. 한편 뉴욕에 계속 정착할 수 있다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었다. 일단, 방문교수로 1년을 머물며 미국과 뉴욕을 경험한 후 미국 체류 최종 결정하기로 했다.
예상했던 대로 시간이 지날수록, 다양한 경험을 할수록, 온 가족이 미국에 정착하면 좋겠다는 마음이 점점 커져갔다. 무엇보다 학생들의 자유와 선택을 존중하는 유연한 교육시스템이 부러웠다. 놀며 공부하는 우리 아이들에게 안성맞춤이었다. 이런 교육 환경에서 아이들을 계속 교육시키고 싶은 욕심이 생겨났다.
또한 뉴욕을 무대로 새로운 세상에서 배우며 활동하는 일이 흥미롭고 즐거웠다. 게다가 미국을 좋아하고 영어가 전공인 남편도 미국에서 일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미국 체류 1년, 미국에서 계속 머물기로 최종적으로 결정하고 한국 소속 대학에 사직서를 과감하게 제출했다. 뉴욕주립대 방문교수에 이어 강의교수와 뉴욕 패션업체 패션전문가로 일을 이어갔다.
새로운 뉴욕 생활
하지만 새로운 환경, 특히 언어와 문화가 전혀 다른 환경에서 남편 없이 혼자서 사춘기 아이들을 데리고 늦은 나이에 공부하고 일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처음엔 미국에서는 수도꼭지만 틀면 새콤달콤 오렌지 주스가 줄줄 나올지 알았다. 평소 싫어하는 서양음식과 햄버거도 열심히 먹어보리라 결심했다. 미국에서 2, 3년만 살면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여 미국인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하고 싶은 일은 뭐든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생각처럼 그렇게 녹록지 않았다. 문제는 영어였다. 동네와 학교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영어공부를 했으나 몇 년이 되어도 바디랭귀지를 동원해야 겨우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혼자 주절주절 떠들기는 하는데 미국인의 발음은 도대체가 들리지 않았다. 패션 사무실에서는 고객의 의도를 놓칠 때가 다반사였고, 대학에서 강의할 때는 학생들과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실습수업에도 PPT 자료와 온갖 시각자료를 준비해야 했다.
미국인지 한국인지 분간이 어려울 때도 있었다. 한인교회(한국어권&영어권예배)에서는 한국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미국 교회에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동네에서도 사정이 비슷한 한국인 가족들과 교제했다. ESL 클래스에서 만난 처지가 같은 외국인들과 교제도 계속 이어가지는 못했다. 원어민은 ESL 클래스 교사와 개인튜터였고, 직장에서 만난 미국인들과 소통도 교제도 쉽지 않았다. 이웃들과도 미소와 '하이~'가 전부였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사춘기에 만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 영어, 친구, 학업, 신앙... 결코 쉽지 않았다. 그나마 교회에 나가며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기 시작했지만 해결할 문제는 산 넘어 산이였다. 아이들에게 개인 미국인 튜터도 붙여보고 주변의 조언도 구했지만 결코 녹록지 않았다.
집에서는 한국식 음식을 주로 만들고, 햄버거는커녕 김치 없이는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여행지에서도 한국식당 찾느라 늘 바빴다.
기러기 가족 10년
어느덧 미국에 정착 10년, 남편과 떨어져 아이들을 데리고 기러기 가족이 된 지 10년이 된 것이다. 이젠 낯선 환경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고, 운 좋게 신분 문제도 해결되어 아이들 학업과 일을 안정적으로 이어갈 수 있었다. 사춘기 시기 미국에 온 아이들은 감사하게도 신앙 안에서 힘든 시기를 잘 넘기고 어엿한 청년으로 장성해 부모로부터 독립할 시기가 되었다.
아이들은 각자의 길을 향해 독립적으로 나아가고 있었고, 학업을 위해 다른 도시로 뿔뿔이 흩어졌다. 서울에 있는 남편은 대학에서 연구와 교육 등 다양한 활동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뉴욕에 혼자 남아 나름대로 꿈을 실현하며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언젠가는 가족이 함께 미국에 살 것을 기대하며.
부부는 함께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고 이렇게 지내다가는 영원히 기러기 부부로 살 것 같았다. 뭔가 다시 변화가 필요했다. 뉴욕정착과 서울정착을 두고 남편과 줄다리기가 시작됐다. 서로가 꿈을 실현하며 한참 달리다가 중도하차 결정하는 것은 절대 쉽지 않았다. 고민이 시작되었고 큰 결단이 필요했다.
긴 고민 끝에 결국, 여러 가지 이유로 내가 한국행을 결심했다. 그동안 이루었던 일, 만났던 사람, 일했던 사무실, 살았던 집, 추억 가득한 동네 뉴욕 맨해튼을 모두 정리한 채, 미국생활을 뒤로하고, 그것도 아이들을 미국에 남겨두고 떠나는 일은 정말 힘들었다.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뉴욕발 인천행 아시아나 항공에 탑승하여 만감이 교차했던 그 순간을.
낯선 서울로
뉴욕을 떠나와 서울에 도착했다. 남편은 옆에 있었지만 갑자기 서울에 덩그러니 혼자 떨어진 느낌이었다. 가끔 방문할 때면 그 정겨웠던 서울은 한없이 낯선 도시가 돼버렸다. 한참을 두문불출, 그렇게 먹고 싶었던 한국 음식조차 먹고 싶지 않고, 그렇게 그리웠던 한국 사람들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당장 다시 뉴욕을 가야 할 것만 같아 짐도 제대로 풀지 못했다.
하루에도 불쑥불쑥 뉴욕은 불청객으로 나타났다. 애써 지우려 해도 뉴욕의 기억은 꿈에도 나타났다. 처음 뉴욕 도착했을 때의 그 설렘, 즐겁게 공부했던 FIT 강의실, 시장 조사하러 활보했던 세계 패션의 중심지 패션 5번가, 뉴욕 패션가에 자리한 사무실, 동고동락했던 동료들, 직접 만든 패턴으로 제작된 옷을 모델이 입고 걸었던 뉴욕 패션쇼 런웨이 무대, 출퇴근 길이면 함께했던 뉴욕 센트럴 팍, 카메라 메고 헤집고 다녔던 뉴욕 골목골목, 서툰 영어로 강의해도 초롱초롱 빛났던 학생들의 눈망울... 애써 외면하려 해도 뉴욕의 환상은 끝도 갓도 없이 이어졌다.
한참을 헤매고 있을 즈음, 지도교수로부터 모교에서 후배들을 위해 강의하라고 호출이 왔다. 드디어 집 밖으로 나와 서울의 이곳저곳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캠퍼스를 걷고, 디자이너 시절 매일 눈도장 찍었던 광장시장, 시장조사차 다녔던 명동 골목, 남대문 시장, 동대문 쇼핑가, 신사동 가로수길까지 쏘다녔다. 배우며 일할 때의 기억이 다시 줄줄이 소환됐다.
다시, 시작이다
꾹꾹 눌러두었던 배움과 일에 대한 열정이 다시 솟기 시작했다. 뉴욕에 가서야 알게 된 솜씨 좋은 한국인의 패션기술을 깊이 알고 싶었다. 어느덧 서울의 패션업계와 패션교육계 현장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차츰차츰 서울 생활에도 익숙해졌고 뉴욕에서 가르치며 일했던 활동이 다시 서울의 일상이 되었다. 다시 대학 강단에서, 패션업계 현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영어로부터 자유로운, 이방인이 아닌 원어민의 일상이 편안함으로 다가왔다. 그간 외면했던 책 읽을 여유시간도 생겨났다. 블로그를 오픈하여 사진을 찍어 올리고 독서 후기를 남기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쓰기 연습을 위해 서울시민기자에 지원해 매주 기사를 썼다. 주말이면 남편과 서울 구석구석 놀러 다니며 사진을 찍고 취재하며 기사를 완성했다.
기자의 관점으로 서울을 바라보니 그간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서울의 모습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사진으로 바라본 서울은 더욱 또렷하게 마음에 새겨졌다. 내 나라 도시 서울 내면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고 우리네 삶과 어우러진 아름다움의 멋이 더욱 깊이 와닿았으며 그 감동은 날로 배가가 되었다.
서울과 뉴욕은 애초 비교 대상이 아니었다. 나의 도시 서울과 미국의 도시 뉴욕은 절대 같은 기준으로 비교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각각의 고유한 멋과 맛이 있었다. 어느덧 서울사랑에 푹 빠졌다. 눈을 뜰 때부터 자리에 눕기까지 하루 종일 서울의 매력에 정신을 빼앗겨 사랑앓이를 톡톡하게 하고 있다. 서울 지도는 늘 내 머리에 활짝 펼쳐있다. 이 순간에도, 또 어떤 서울의 매력을 어떻게 기사로 담을까 곰곰 생각 중이다.
괜찮아, 뉴욕이 아니어도 괜찮아
사랑했던 뉴욕과는 결별해 이미 남남이 되었고 이젠 다시 사랑하게 된 서울과 함께 하기로 했다. 아직도 가끔은 헤어진 연인처럼 뉴욕이 불쑥불쑥 어른거릴 때도 있지만, 이제 뉴욕은 가끔 방문하는 추억의 여행지로 충분하다. 뉴욕은 이렇게 'Out of sight, out of mind', 점점 내 눈에서 내 마음에서 멀어지고 있다. 확실한 것 하나, 이젠 내 마음에 위로의 말을 전할 수 있다. 그래 이젠 "뉴욕이 아니어도 괜찮아"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