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연필로 쓰기, 김훈

2020. 4. 9. 20:43책읽기/책읽기_여러분야

얼마 전 <자전거 여행 1, 2>를 읽고 이어서 <연필로 글쓰기>를 읽었다. 다음은 <라면을 끓이며> 차례다.

 

저자는 이 책에서도 여전히, 무심하게 지나치기 쉬운 주변의 일상적인 사물과 현상을 미사여구 없이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표현한다. 이를 통해 우리의 생생한 삶을 면밀하게 들여다보게 하고 나아가 우리의 민낯을 살펴보게 한다. '똥과 밥'이야기로 시작해서 '새와 고래' 이야기까지 일상 속 삼라만상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저자와 함께 주변을 찬찬히 들여다 보았다. 저자의 연륜을 통해 묻어나오는 삶의 지혜가 풍성하다.

 

<본문 중에서>

 

- 호수공원의 산신령

공원에서 여성 노인들은 주로 수다를 떨었다. 그들은 생애 전체와 눈에 보이는 것 모두를 수다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놀라운 언어능력을 지니고 있다.

- 꼰대는 말한다.

주례를 맡았을 때 남편과 아내가 요리를 배워서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인간의 정서는 먹는 것에 크게 지배받기 때문에 인스턴트식품을 너무 자주 먹으면 삶을 가볍게 여기는 일회용 마음이 형성되기 쉽다고 나는 말했다. 제 손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은 왜 소중한가. 그것은 영양가 있고 깨끗한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섭생적 의미도 있지만, 음식을 만드는 과정에서 생활을 사랑하고 현실을 긍정하는 심성이 인격 안에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신랑 신부는 나중에 자식들을 결혼시킬 때 자식들이 주역이 되고 부모가 하객이 될 수 있도록 자식들을 키우라. 성격차이로 이혼했다는 말은, 이른바 사랑이 사그라진 자리에 연민이 생겨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랑은 단거리이고 연민은 장거리이다. 빚쟁이처럼 사랑을 내놓으라고 닦달하지 말고 서로를 가엾이 여기면서 살아라.

- 떡볶이를 먹으며

어머니는 서울 토박이, 깍쟁이 여자였고 고향을 자랑으로 여겼다. 어머니는 간장 베이스 떡볶이가 순 서울식이며 대궐에서 임금님이 드시던 음식이라고 늘 자식들에 게 자랑했다. 내가, 임금님은 맨날 이런 것만 드시냐고 물었더니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간장 베이스 떡볶이 맛은 단정하고 질서가 잡혀 있었다. 젊은이들은 떡볶이를 간식이라기보다는 점심의 끼니로 먹고 있었는데, 떡볶이에는 끼니의 무게가 빠져나가서 끼니는 경쾌하다. 다들 밥벌이는 힘든 것일 테지만, 떡볶이를 먹는 낮시간의 밥벌이는 좀 덜 힘들어 보였다.

- 박정희와 비틀스

그처럼 메마른 시대에도 어린이들이 볼 것 같은 동요를 몇 곡 만들어주어서 어린이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었다. 내가 어렸을 때 좋아했던 노래는 <나뭇잎 배> (윤용하 작곡)였다. 전쟁에 시달리는 아이들의 마음을 쓰다듬어주려는 기획의도가 있었다고 하니, 바로 나를 위해 만들어준 노래였다. '낮에 놀다 두고 온 나뭇잎 배는 엄마 곁에 누워도 생각이 나요." 이 노래가 내 마음을 쓰다듬어주기도 했지만, 노래를 부르고 나면 더욱 슬펐다. 그 무렵 나의 주요 일과는 이동하는 미군부대의 지프 행렬을 따라다니며 초콜릿을 얻어먹는 것이었다.

- 오이지를  먹으며

퇴계의 진짓상은 정갈하고 삼엄했는데, 먹는 즐거움은 그 경건함에 있었다. 그분의 식사는 자연을 인간의 몸으로 받아들여서 생명의 동력을 얻는 거룩한 행위였다. 오이지 맛은 두 가지 모순된 국면을 통합한다. 그 두 개의 모순은 맛의 깊이와 맛의 경쾌함이다. 이 양극단의 모순이 한 토막의 오이 속에서 통합되는 비밀을 나는 설명할 수 없다. 짐작건대 이것은 소금과 물과 오이가 항아리 속에서 스미고 배어서, 새로운 맛으로 태어나는 모든 과정을 '시간'의 섬세하고 전능한 작용이 종합 관리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지 싶다. 오이지를 먹을 만하게 담그는 일은 쉽지 않다. 이 솜씨는 가르쳐서 될 일이 아니고 스스로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면서 깨우쳐야 하는 자득의 세계이다. 자득의 세계는 숨을 곳이 없고 기댈 곳이 없다. 오이지는 미래의 기간을 받아들여서 스스로 변하고, 그 변화 속에 지나간 시간을 갈무리한다.

- 할매는 몸으로 시를 쓴다

자라는 것들을 길러서 자라게 하는 일상의 노동에서 할매들은 삶의 곤란을 감당해내는 마음의 힘을 키워왔다. 할머니들은 생명을 가꾸고 키움으로써 스스로의 생명을 긍정했고, 작은 소출을 귀하게 여겼다. 할매들은 늘 생산노동과 가자 노동을 겸했다. 할머니들은 그 가혹한 억압과 빈곤 속에서도 키우는 자의 심성을 보존했고, 그 심성 위에 생애를 건설할 수 있었다.

- 공차기의 행복

공을 쫓아서 따라가는 인간을 바라보면서 나는 둥글다는 것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다. 둥근 것은 거기에 가해지는 힘을 정직하게 수용하고, 땅에 부딪히고 비벼지는 저항을 순결하게 드러내서, 빼앗기고 뺏는 동작들 사이의 적대관계를 해소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