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일상] 책 사주는 남자

2020. 4. 18. 16:31따로 또같이, 함께읽고 함께쓰기

 

책 사주는 남자

 

'삐삐~ 삐삐~' 현관문 키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어린아이처럼 환한 얼굴로 들어온다. 양손 가득 책 보따리를 들고 있다. 퇴근길 도서관에서 빌린 책과 인터넷으로 주문한 책이다. '책 사주는 남자' 남편의 등장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선생님으로 계신 시골 초등학교를 다녔다. 담임선생님의 강권으로 갑자기 전교 어린이회 독서 부장이 되었다. 자녀들에게 독서를 강조하신 아버지의 물밑 작업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매주 어린이 회의 때마다 전교생 '매주 1인 1권 읽기'를 주장했다. 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단지 주장에 불과했다. 부모를 떠나 도시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했고 교내 독서동아리에 들어갔다. 당시 오빠 3명과 자취를 했으니 밥하고 청소, 빨래하느라 독서는 커녕 수업진도 따라가기도 버거웠다. 책을 읽는 것은 나에게 사치였다. 결국 동아리를 나오고 말았다. 그때부터였을까. 책은 나로부터 점점 멀어져 갔다.

 

남편과 선을 본 후, 첫 데이트 하던 날, 말수 적고 숫기 없는 남편의 손엔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선물하기 위해 가져 온 책인가 기대했는데 지하철을 타자마자 나를 옆에 세워두고 남편은 그 책을 펴서 혼자 읽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으로 당황이 되어 혼자 멀뚱멀뚱 창밖만 바라보았다. 하지만 알고 보니 독서광이었다. 당시 직업도 없이 군 복무 중이었지만 '책을 읽는 남자'라면 미래를 함께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 후, ‘책 사주는 남자’는 평생 집으로 책을 갖다 날랐다. 하지만 살림과 육아, 직장 등 바쁘다는 핑계로 나는 늘 책을 외면했다. 한쪽에 책을 밀쳐 두기 일쑤였고 그 책들은 펼쳐본 흔적도 없이 책장으로 줄줄이 옮겨갔다. ‘책 사주는 남자’는 책이 눈에 띄도록 온갖 방법을 동원해 여기저기 책들을 늘어놓았다. 거실탁자와 화장대, 침대, 화장실, 자동차, 어떤 땐 출근하는 내 숄더백에도 있었다. 책들은 치워도 치워도 다시 쥐도 새도 모르게 끝없이 내 주위에 출몰했다가 여지없이 다시 책장으로 들어갔다. 오랫동안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책을 읽어야 한다는 부담은 끝없이 나를 따라다녔다.

 

5년 전, 은퇴를 준비할 때쯤, 일만이 세상 전부인지 알고 살았던 '일만 하는 여자'는 문득 궁금했다.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는 주제, "나는 누구인지, 나는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다른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책장 구석으로 옮겨간 책들을 한 권 한 권 꺼내 읽기 시작했다. 읽다보니 책을 제대로 읽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때 절묘하게 만난 <Let's 1111, 1주 1권 읽고 1년 1 권쓰기, 국민연금공단 노후준비서비스 프로그램> 문화 활동은 나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았다. 

 

은퇴를 하자마자 본격적으로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다양한 책의 저자와 책 속의 주인공들을 만나면서 나와 주변, 새로운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생각은 때론 충격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다, 울다 웃다가, 밑줄을 긋고 메모지도 붙였다. 

 

어느덧 ‘책 읽는 여자’가 되었다. ‘책 사주는 남자’는 '책 읽는 여자'를 위해 오늘도 책을 탐색하느라 바쁘다. 책을 읽다가 궁금한 것이 있어 질문이라도 한 마디 하면 구구절절 끝도 갓도 없이 얘기를 늘어놓는다. 평소 말수 없고 조용히 '책 사주는 남자', 이렇게 말이 많은지 몰랐다. 둘이만 사는 조용하고 정돈된 집안은 여기저기 읽고 싶은 책들로 널브러져 있다. 남편과 매일 걷는 고요한 산책길에도 책 이야기 나누는 왕수다 부부로 변신했다.

 

'책 읽는 여자'는 장르를 넘나들며 책 읽는 재미에 푹 빠져있다. 종종 글도 쓴다. 책을 읽고 글을 쓰니 삶을 더욱 잘 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삶의 가치와 잘 산다는 의미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며 살아온 나를 찬찬히 돌아보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의 관점으로 나와 주변 사람을 들여다보았다. 어슴프레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고 가까이 있는 글 벗과 스승들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요즘 '책 읽는 여자'에게 책 읽기를 넘어 '좋아하고 잘하는 일'들이 하나 두울 생겨났다. 우선, 여러기관의 '시민기자단' 활동을 펼쳐가고 있다. 올해에는 서울시민기자 사진/영상부 우수기자로 서울특별시장상을 받았다. 또, 매년 1권씩 책을 출판하는 '작가'가 되었다. 혼자서 또는 가족과, 친구들과 벌써 4권의 책을 출간했다. '작가'로 변신한 셈이다. 그리고 블로그를 만들어 책 읽기와 글쓰기 등의 일상을 담아내고 좋아하는 사진을 올리며 '블로거'로 활동한다.

 

더불어 주변 사람들을 독려하여 블로거와 작가, 시민기자로 만들고 블로그 운영과 책 출간 교정, 기사 쓰기를 돕고 있다. 이제 막 평소 꿈꾸었던 'N 잡러'를 실행하기 위한 <나 주식회사> 설립 작전이 시작됐다. 회사의 미션, 비전, 사업영역, 핵심가치, 슬로건 등 회사의 밑그림을 그려가고 있다. 지금 이 순간도 머리는 바쁘게 돌아간다.

 

5년 전 은퇴를 준비하며 시작했던 <Let's 1111(1주 1권 읽고, 1년 1권 쓰기)>, 나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그냥 놀기만 할 거라 생각했던 막연한 노후가, 상상도 못 했던 풍요롭고 다채로운 인생 2막이 열리며 날마다 생기와 활기로 넘쳐난다. 하마터면 놈팽이, 백수건달이 될 뻔했는데 말이다.